藝堂의 산문

여주 문화 답사기

예당 조선윤 2011. 8. 30. 21:40

 

                                                                    여주 탐방

                                                                                                        예당 조선윤

 

 

   여주는 가까이 있으면서도 신륵사만 지날때마다 몇 번 들렀을 뿐, 구석구석을 다 돌아보지 못해서 다시 한 번 꼭 가보고 싶었는데, 마침 탄천 문학기행이 추진 되어 연일 계속되는 장마에 곳곳에 산사태로 인명피해가 속출하고 가옥과 많은 차량이  물에 잠기고 피해가 커서 떠날 수 있을까 염려했는데 전날만해도 억수로 퍼붓던 비는 그치고 날씨도 맑게 개어서 계획에 차질 없이 떠날 수 있어 좋았다. 탄천문학회 일행은 아침 8시에 성남 아트센터에서 집결하여 가는 길이 피서 철이라서 교통이 많이 막히고 복잡했지만 함께 떠난다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영릉 앞에서 탄천문학 단체 사진

 

 

  먼저 영릉을 돌아보았다.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단다. 여행자를 과거로 초대하는 명당에 자리잡고 있는 조선왕조의 왕릉 가운데 최초로 한 봉분에 다른 방을 갖추도록 조성된 '합장릉으로써 조선 제4대 임금인 세종의 업적에 뿌듯함을 느껴 본 영릉은 울창한 송림과 어울려 있는 능의 영역도 인상적이었고 입구주변에 자리한 600년 시간 숲을 거슬러 올라가보았다. 원래는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헌릉 서쪽에 조성하였고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했단다. 석실 가운데 칸막이에는 구멍을 뚫어 왕과 왕비의 혼령이 서로 왕래하도록 배려했다. 또한 기존의 왕릉에는 난간석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여 방위를 표시하였는데 영릉은 이를 간소화하여 십이지를 문자로 표현하여 석실과 병풍석을 조성하지 않으니 능역에 동원된 부역이 6천명에서 절반인 3천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명성왕후 기념관 앞에서

 


  유스호텔 옆에 자리한 명성황후 생가로 일행은 발길을 돌렸다. 정자에서 회장님이 싸오신 과일로 입가심을 하니 갈증이 사라졌다. 이곳에서 출생한 명성황후가 8세까지 사셨다고 한다. 당시의 건물은 안채만 남아 있으며 별채와 사랑채 등은 다시 복원했다고 한다. 그리고 기념관은 생가 건너편 널따란 평지에 황후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한 목적에 걸맞도록 건축되어 있었다. 여흥 민씨는 많은 인재를 배출한 좋은 집안 환경의 영향으로 황후께서는 비록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현숙한 어머니와 오빠 민승호의 가르침 아래 손색없는 명가의 규수로 성장할 수 있었다. 명성황후께서는 친척이었던 흥선대원군 부인의 추천을 받아 16세에 왕비로 간택되었다. 왕비가 되기 전에는 가정에서 고전을 공부하고 왕비가 된 뒤에는 대궐안의 수많은 서적들을 탐독하면서 전통과 현대에 대한 탁월한 식견을 바탕으로 외교역량을 갖추게 되었으며 마침내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의 10년 섭정이 끝나가자 고종임금을 내조하면서 본격적인 조선왕조의 근대화작업에 착수했다.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을 만들어 고종황제께서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시기도 했다. 

 

명성황후 추모비

 


  동학농민전쟁이 일본의 개입으로 평정되자 경복궁을 점령하고 개혁을 구실로 내세우며 대한제국의 왕권쟁탈을 시도했다. 이런 음모를 분쇄하기 위한 외교 전략으로 러시아와의 관계가 급속도로 가까워지게 되었다. 일본이 이를 알고 새벽에 일본의 낭인무사 패거리가 경복궁에 난입하여 거침없이 궁내부를 휘젓고 다녔다. 건청궁에 계시던 고종과 태자는 공포에 떨었고 옷이 찢기기도 했다. 태자는 낭인이 휘두르는 칼에 맞아 의식을 잃었다. 그러나 그들이 찾는  명성황후가 없자 옥호루로 몰려갔다. 궁내부 대신 이 경직이가 만류하자 그를 칼로 쳐 죽이고 안으로 들어가 마침내 명성황후를 발견하는 즉시 칼로 살해하고 만류하던 궁녀들도 함께 죽였다. 시신은 옥호루 옆의 숲속에서 화장하여 버렸다. 명성황후를 참살하는 천인 공로할 만행을 자행하는동안  일본 군인들은 경복궁을 철통같이 통제하고 있었다. 명성황후는 그때 나이 45세로 파란만장한 짧은 생애를 마쳤다. 참으로 후안무치의 행동이 아닐 수 없으며 역사상의 비극적 현실이었다. 명성황후의 생가와 기념관을 돌아보고 많은 것을 깨우쳤다. 당시의 열강 틈에서도 명성황후의 마지막 구국이념이었던 이이제이의 몸부림이 있었던 것을 돌이켜 생각하니 무능한 정부가 너무나 안이하게 보는 국방문제와 경제문제들이 곧 국민의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러기에 기념관을 나올 때 발걸음이 무거웠다. 

 

 

목아박물관에서 정답게


  목아박물관은 목조각장 부문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목아(木芽)박찬수 선생이 1993년 6월 설립했다. 이 박물관은 불교미술 및 전통 목공예의 제작과정과 기법을 전승시키는데 목적을 두고 설립된 전문 박물관으로 현대식 분위기에서 불교문화의 향기를 음미할 수 있다. 지하1층, 지상3층의 전시관에 불화와 불상, 서예품, 동자상을 비롯한 각종 불교관계 유물과 목공예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야외 조각공원에는 미륵삼존불, 비로자나불, 삼층석탑, 백의관음상 등이 자리잡고 있다. 목조각 작품을 중심으로 방대한 불교 관련 조형물들을 전시하고 있는 이 박물관의 전시품들은 대개 박물관 건립자인 목조각 부분 무형문화재 목아 박찬수 선생의 작품들이다.야외 전시장에는 불교와 관련된 석물들과 기타 조각품들이 전시되어 전시품 하나하나가 모두 예술가들의 정성이 담긴 작품들임을 쉽게 느낄 수 있을 정도여서, 여타 다른 박물관과는 확연한 차이가 난다. 또 야외 전시장은 전시물 외에도 연못과 잔디밭, 나무 등이 잘 어우러져 편안한 느낌을 주고, 큰말씀의 집, 한얼울늘집 등의 전통건축물들이 있다. 조각품 하나하나가 너무도 섬세해 보는 이들의 탄성을 일으킨다.

 

실륵사에서 익살스런 모습에 미소가 절로~~~

 

 

 구비구비 흐르는 남한강을 끼고 전망도 좋아서 신륵사는 언제와도 좋다.사대강 사업이 아직도 진행중이다.신라 진평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한것으로 되어 있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고 한다.고려말 1376년 나옹 혜근선사가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하다.고려 때부터 벽절이라 불러지기도 했는데 이는 경내 동대위에 있는 다층전탑을 벽돌로 쌓은데 유래 한다고 한다.일주문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삼일기간의 마음수행이라도 천년의 보배요 백년의 탐욕은 하루아침의 티끌이로다." 대부분 큰 절에는 일주문-천왕문-불이문 세개의 문이 있는데 신륵사는 천왕문을 위와 같이 표현한 모양이다. 천왕이라고 하긴 좀 귀여운데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스승인 무학대사의 스승, 나웅선사가 건립했다는 설이 있고 혹자는 신라진평왕때 건립된 사찰이라고 한다. 경내 600년된 나무들과 마모된 화강암 계단등으로 보아 그 역사가 짐작된다.미니 톨탑과 함께 살포시 꾸며져 있는 대웅전, 눈에 보이는 강줄기가 시원하다.

 

이천 청목 쌀밥집에서 저녘 만찬

 

 

  마지막 코스인 이천 도자기 전시장을 둘러 보았다. 이천의 명물답게 하나하나 정성으로 빚은 작품들이 빛나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도공의 생각과 뜻대로 도자기의 모습이 빚어지고 만들어져 불가마에서 며칠을 뜨거운 온도에 견디며 탄생했을까? 정말 아름답고 멋있는 작품이라도 도공은 망치를 들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도자기를 깨어 버리고 선택된 작품들이 아닌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명품의 그릇을 만들기 원하는 도공의 마음으로 그 어떤 흠도 찾아 볼 수 없도록 심혈을 기울이고 비록 그 모양도 다르고 쓰이는 곳도 다를지 모르지만 한결 같은 마음으로 만들어지는 것. 흠이 있는체로 세상에 나간다면 그 흠으로 인해 도공의 이름과 명성에 금이 갈것이다.그의 이름이 도자기 바닥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짝퉁이 판을 치고 있는 세상에 그들의 겉 모습은 명품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자세히 살펴 보면, 그들의 삶과 모습이 선함과 친절과 착함으로 위장 되어 있는 것을 볼것이다.하지만 도공은 안다.그들에게 흠이 있다는 것을... 이천의 대표 음식 이천 쌀밥집 청목에서 임금님 수랏상으로 차려진 화려한 한정식으로 마지막 장식을 했다. 위에 곁상을 올리고 나온 반찬과 요리들이 도대체 몆첩반상일까? 돌아오는 발걸음이 흐뭇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