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란 무엇인가
(1) 학문으로서의 문학
(2) 문학과 창작
1) 허구적 사실 2) 사실적 허구
(3) 허구, 또 다른 사실 만들기
(4) 창작과 창작인
1) 문학적 기제 2) 창작인의 긍지
(1) 학문으로서의 문학
문학/literature이란 무엇인가. 언어로 쓰여진 작품, 그것을 연구하는 학문, 그것이 문학이다. 학문이란 무엇인가. 학문이란 과학/science의 번역어이다. 연구가 학문의 특성이다. 연구의 대상에 따라서 학문은 세 개의 영역으로 나뉜다. 자연현상을 연구하는 것이 자연과학/natural sciences이다. 사회현상을 연구하는 것이 사회과학/social sciences이다. 인간성/인간적 가치를 연구하는 것이 인문학/humanities이다. 연구의 목적도 영역마다 조금씩 다르다. 자연과학에서는 자연현상의 법칙을 좇는다. 사회과학에서는 사회현상의 특성/경향을 구한다. 인문학에서는 인간성 또는 인간적 가치의 본질을 알고자 한다. 그러나 어느 영역도 개별적/특수적/실제적 현상/사실을 연구하여 전체적/보편적/추상적 원리를 찾고자 한다는 점에서 모두 같다.
연구의 방법도 세 영역이 조금씩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가령 자연과학에서는 관찰을 더 중시한다. 사회과학에서는 묘사에 더 의지한다. 인문학에서는 해석을 보다 귀하게 여긴다. 그러나 어느 영역에서의 연구방법도 분석과 설명을 필수로 한다는 점에서는 모두가 같다. 어느 영역의 연구도 여러 현상/사실을 유형화한다. 유형화는 객관적 기준에 의거한다. 여러 유형 사이의 차이점과 유사성을 비교/검토하여 어느 특정한 현상/사실이 전체적인 맥락에서 가지는 상대적 위치를 말하는 것이 유형화작업이다. 이 유형화작업이 분석의 실질적인 내용을 이룬다. 이런 분석을 거쳐야 비로소 어느 현상이나 사실이 전체의 맥락 속에서 자리하거나 움직이게 되는 원리가 제대로 포착된다. 객관적 기준에 입각한 유형화, 유형화에 바탕을 둔 분석, 분석의 결과는 다! 시 설명으로 이어진다. 설명은 합리적/체계적/논리적으로 이루어진다.
객관적/합리적/체계적/논리적 분석과 설명은 모든 학문의 모든 연구에서 빠질 수가 없다. 그러한 분석과 설명에 의거하여 도출된 결론이 지식/knowledge이다. 지식은 과학의 다른 말이고 과학은 학문의 다른 말이다. 지식과 과학과 학문이 동의어로 일컬어진다고 해서 크게 잘못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이유이다. 문학이 학문인 이상 그것도 기본이 지식이고 과학이어야 마땅하다. 문학은 학문 가운데서도 인문학에 해당이 된다. 문학은 철학과 역사학과 함께 인문학의 중추로서 널리 알려져 왔다. 인문학으로서의 문학은 두 분야에 의하여 견인되어 왔다. 하나가 문학비평이고 다른 하나가 문학사이다.
과학이란 말은 주로 자연과학의 그것을 의미하였다 특히 처음에 그러하였다. 그런 사정을 들어서 인간적 가치를 다루는 인문학을 과학으로 간주하는 것은 무리라는 견해도 있다. 그런 면이 물론 있다. 그러나 인문학이 학문의 울타리 안에 남아 있는 한 과학적 사고와 방법을 무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럴 경우에 오늘날 과학을 꼭 자연과학으로 좁게 못박아 보아서 반발할 필요가 없다. 오늘날 학계에서 흔히 그렇게 하고 있듯이 자연과학의 연구방법에 준할 정도로 객관성을 유지하면서 도출한 체계적인 지식이 있다면 그것까지도 넓은 의미에서 과학이라는 의미로 파악할 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2) 문학과 창작
1)허구적 사실
문학을 이끌고 있는 두 분야는 문학비평과 문학사이다. 학문으로서의 문학에서 창작에 맡겨진 제 역할이 없다. 물론 창작이 없는 곳에 문학비평이 있을 수는 없다. 문학사도 사정은 매한가지이다. 문학비평이건 문학사이건 모두가 창작을 가지고 작업을 한다. 이러한 경우에 그러나 창작은 어디까지나 그들을 위한 소재가 될 뿐이다. 문학의 울 안에서는 창작이 주체성을 가지고 그 나름의 독자적인 활동을 할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창작은 문학의 영역에서 제 자리를 요구할 권리를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창작의 활동 무대는 문학의 영역 밖에 있다. 창작의 이러한 처지가 혹 문학에 대하여 섭섭한 마음을 가지는 이유가 될 수도 있을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옳다고 볼 수가 없다. 문학 밖에서 누리는 창작의 위치는 오히려 창작의 긍지라는 점에! 서 그러하다. 문학에서는 창작이 있고야 비평도 역사도 있다. 창작이 가질 수 있는 자긍심이 문학을 압도하고도 남는 까닭이다. 톨스토이는 문학비평은 아예 없어져야 할 것이라고까지 말한 적이 있다. 오늘날 문학비평에 대한 이러한 전투적인 태도는 옳지 않다. 다만 톨스토이의 경우는 오늘날 문학에 대한 문인들의 자부심을 옹호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말이다.
문학과 창작은 서로 다르다. 관심사가 서로 다르다. 따라서 하는 일도 서로 다르다. 문학에서 사실들을 어루만지고? 있을 때 창작에서는 허구를 매만지고 있다. 문학에서 객관적 기준을 찾고 있을 때 창작에서는 개인의 생각을 더듬고 있다. 문학에서의 일은 객관에서 출발하여 객관으로 끝난다. 창작에서의 일은 주관에서 출발하여 주관에서 끝난다. 문학에서 최종적으로 일구어 내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다. 창작에서 마지막으로 마무리하는 것은 주관적인 허구이다. 객관과 주관, 사실과 허구,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허구, 이것이 문학과 창작을 하나로 볼 수 없는 뚜렷한 징표이다. 특히 사실과 허구는 문학과 창작의 서로 다른 특성을 가장 잘 말하여 주는 대표적 메타포이다. 서로 다르다는 것에서 더 나아가 서로에게 대립/투쟁의 소지조차 남겨주?! ? 있는 것이 위의 메타포이다. 창작이 가지는 비문학적/반문학적/초문학적 속성도 여기서 찾아진다.
문학은 사실을 밝혀내고 창작은 허구를 만들어낸다. 각자의 작업이 서로 다른 만큼 그것을 이루어낼 수 있는 수단도 서로가 다르다.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둘 다 언어이다. 그런데? 각자가 쓰는 도구로서의 언어에 서로 차이가 있다. 문학에서는 관찰의 대상이 되는 사실/사물은 본인/당사자여야 한다. 그것은 다른 사실/사물로 대체될 수가 없다. 창작의 경우는 이와 정반대이다. 사실/사물을 직접 대면하여 관찰하지 않는다. 본인/해당자는 자리를 비켜주어야 한다. 해당되는 사실/사물을 비유적으로 상징하여 주는 또 다른 어떤 사실/사물을 별도로 설정하여 그것을 관찰한다. 문학에서는 사실/사물 그 자체여야 하지만 창작에서는 반대로 사실/사물의 상징을 써서 말한다. 당사자와 대표, 사물과 상징, 이것은 넓게는 문학의 사실해명과 창작의 허구짓?! 藪? 있어서 서로 다른 전제적 조건이다. 그것은 좁게는 문학과 창작의 언어사용에 대한 서로 다른 전제적 조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학과 창작의 언어사용에 있어서 서로 다른 전제적 조건이 따로 더 있다. 이것이 실제에 있어서는 더욱 중요하다. 문학에서는 개념을 중시하고 창작에서는 이미지를 중시한다. 문학에서 부리는 언어는 어느 것이건 개념이 명확하여야 하고 창작에서 구사하는 언어에서는 이미지가 명확하여야 한다. 개념이란 무엇인가. 사물은 어느 것이나 그것의 존재가 있다. 그 존재를 증거하여 주는 것은 특징/속성이다. 어느 사물이라도 특징/속성은 많이 있다. 그 많은 특징/속성 가운데 그것이 없으면 그 존재가 확인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러한 특징/속성은 최소한의 것이다. 그것이 개념이다. 그러나 어느 사물도 시간이 흐르거나 지역이 달라서 또는 계급이 달라서 사람들이 각기 그 사물을 경험하는 바가 달라질 수가 있다. 그에 따라서 어느 사물이 가지는! 특성이나 속성은 더욱 늘어나게 된다. 이렇게 최대한으로 잡아볼 수 있는 특징이나 속성이 이미지이다. 쉽게 말하면 사전에서 우리가 접하는 어느 사물에 대한 의미는 개념에 해당한다. 그런 개념까지를 포함하여 어떤 사물하면 떠올려지는 의미는 모두가 다 이미지에 해당이 된다.
개념과 이미지는 모두가 어느 사물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특징/속성이라는 점에서 같다. 그러나 개념은 엄격성과 객관성이 강하다. 이미지도 물론 객관적이고 엄격하기는 하지만 그 강도는 개념의 경우에 비하여 훨씬 덜하다. 어느 사물이 가지고 있는 개념은 적은 수이지만 이미지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문학에서는 언어를 도구로 삼아서 무엇을 이야기할 때 개념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써야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해당자의 단순한 미덕일 수 없다. 문학인에게는 그것이 그들의 의무이다. 마찬가지로 창작인에게는 이미지로 말하는 것이 그들의 피해갈 수 없는 책무이다. 시짓기를 흔히 형상화라는 말로서 일컫는 수가 있기도 한 것은 그래서 우연이 아니다. 형상이란 이미지/images의 번역어이다. 형상화란 쉽게 말하면 이미지를 가지고 말한다는 뜻! 이다.
2) 사실적 허구
창작은 문학일 수 없다. 거듭 이야기지만 문학은 객관적 사실을 추구하고 창작은 주관적 허구를 좇는다. 객관과 주관은 상반개념이다. 사실과 허구도 상반개념이다. 그러므로 둘은 상반되는 두개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적으로 그러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고 실제도 반드시 그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는 또 다른 이야기이다. 객관은 문학의 연구자에게 있어서 하나의 당위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연구자가 주관의 개입을 피해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연구자는 기계가 아니다. 그렇다고 그가 신도 아니다. 그는 인간일 따름이다. 인간은 인간적 가치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을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 논리와 논거를 가지고 말하면 연구자가 언제나 사실만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아무리 엄격한 ?! П맛愍? 연구라고 하더라도 거기에 어느 정도 허구적인 요소가 끼어드는 일은 말릴 수가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실제가 그러하기 때문에 오히려 문학의 연구자는 더욱이나 객관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문제는 창작을 맡고 있는 창작인의 경우이다. 객관과 주관의 문제, 사실과 허구의 문제에서 창작인은 현실적으로 어떠한 처지에 있을까. 그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 이러한 의문에 답하는 것은 연구자의 경우에서처럼 단순하지 않다. 문학인은 이미 일어나 있는 일을 다룬다. 이러난 일이란 대개가 누가 이미 써놓은 작품이다. 누가 무슨 작품을 써놓았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가 없는 객관적인 사실이다. 창작인은 이 점에서 전혀 다르다. 그러한 개관적인 사실을 만들어 내는 이가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그가 어떤 작품을 쓰건 말건 쓰는 경우에도 어느 작품을 쓰건 그것은 창작인의 의사에 전적으로 달려 있는 문제이다. 이 점에서 볼 때 문학인의 작업은 출발에서부터 객관적이고 창작인의 작업은 주관적이다. 그 뒤에 문학인의 연구는 이미 있는 작! 품의 내용을 객관적으로 인정해야 하지만 창작인의 경우는 그러하지가 않다. 작품의 내용을 고치건 말건 아예 폐기시켜버리건 모두가 그의 주관적 판단에 맡겨져 있다. 결론도 마찬가지이다. 문학인은 누구에게나 받아드려지는 이야기를 결론으로 전하지 않으면 않된다. 이것은 누구도 다툴 수가 없다. 그러나 창작인은 그렇지가 않다. 남에게 받아드려지건 말건 작품을 쓰면 그만이다.
그것 때문에 작품이 의미가 없다고는 하지 않는다. 문학인과는 다르게 그에게는 그러한 불문율 자체가 없다. 창작인에게는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당위 같은 것이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의 임무가 허구라는 본래적 성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허구란 그 내용이 무엇이건 애당초 개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어느 소재를 택하여 무슨 주제로 어떻게 푸로트를 짜서 무슨 이야기로 서사를 만들건 그것은 창작인의 자유이다. 그 내용이 설사 황탄하여 도무지 불합리한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창작인이 그의 의무를 저바렸다는 비난을 받을 필요는 없다. 서사의 내용이 설혹 현실적이지 않고 그래서 사실적이지 않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비난을 받을 필요는 없다. 창작인에게 사실을 밝히라는 것이 아니고 허구를 꾸며내는 일을 임?! シ? 맡긴 이상은 그의 허구를 가지고 설령 사실적이다 아니다 하고 왈가왈부는 할 수 있을지언정 그것을 가지고 그의 지위 자체를 박탈할 듯이 그에게 다구쳐 말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이 점에서는 문학인의 경우와 전혀 다르다. 문학인과는 반대로 창작인에게는 그만큼 주관성과 그만큼 자유로움을 처음부터 허용하고 있는 셈이다.
허구짓기라는 창작의 임무를 상기하면 누구나 창작이 문학과 같을 수가 없고 창작물이 객관적 사실과 같을 수가 없다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창작의 임무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조금 더 따져 보면 이 점은 더 이상 의문의 여지조차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문학의 언어를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이라고도 하고 삐딱하게 말하기/oblique oration이라고도 한다. 이 말은 서로 사이에 뉴앙스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허구의 내용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같다. 그리고 종래 알려져 있는 객관적 사실을 뒤집어서 반대로 말하는 것이 허구의 내용을 이루어야 한다는 점에서도 둘은 같다. 객관적 사실을 반대로 말하는 것이 허구의 내용이라는 뜻이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창작인의 허구가 사실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일은 그 자체가 ! 애당초부터 있을 수가 없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창작은 더 이상 객관적 사실과 무관한 것인가. 창작인은 그에게 허용돤 주관과 자유의 특권을 를 무제한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창작인이 듣게 되면 좀 우울한 말이지만 그 대답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객관적 사실을 반대로 말한다는 것은 종래의 것에 반대가 되는 또 다른 객관적 사실을 창조하여낸다는 뜻이다. 또 다른 객관적 사실의 창조가 바로 허구만들기라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되면 창작인도 문학인과 마찬가지로 결코 객관적 사실에서 자유롭게 벗어나 살 수가 없다. 허구 속에 담겨져 있는 또 다른 객관적 사실이 실질적인 의미을 지니려면 그것이 객관적인 사실로서 인정받는 일이 전제가 되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렇게 당연한 일이 유감스럽게도 창작인들에 의하여 간과되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창작인은 어떻게 자기가 지어낸 허구 속의 또 다른 객관적 사실을 명실이 부합되도록 객관적 사실로 거듭나게 할 수가 있을까. 프로트를 짜서 서사을 만들고 그 안에 어느 이야기를 만들어 넣어야 비로소 창작인의 허구가 만들어진다. 그럴 경우 이러한 일련의 작업이 합리적/논리적/체계적이어야만 독자들이 수긍이 갈 것이라는 점은 이를 나위가 없다. 그렇다면 창작인도 문학인과 꼭 마찬가지로 학문적/과학적 방법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이 된다. 이 점에서 창조는 문학과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놓이게 된다. 창조는 이론적으로는 문학과 상반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문학과 상응/조응하여 그것과 조화를 이루는 관계에 놓여 있다. 그것은 창작이 가지고 있는 양면성에서 기인한다. 그러한 양면성이 창작이 가지는 중요한 특성이다.!
(3) 허구, 또 다른 사실 만들기
허구짓기에는 사실이 아닌 것을 만든다는 의미가 있다. 객관적 사실을 부정하고 주관적 사실을 만드는 것이 허구짓기라는 뜻이다. 그러나 허구짓기에는 또 다른 사실을 만든다는 의미도 있다. 이것은 좀 더 적극적인 의미이다. 주관적 사실을 개관적 사실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 허구짓기라는 뜻이다. 이것이 defamiliarization 또는 obliquity라는 용어에 함축되어 있는 허구짓기의 뜻이기도 하다. 작가가 허구짓기의 두 번째 의미를 반드시 좇아야 하는 것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푸로페션날 작가라면 그런 의미로 허구짓기를 이해하는 것이 그의 의무가 아닐까 한다. 어쨌거나 두 번째 의미에서의 허구짓기를 받아드리게 되면 작가는 커다란 숙제를 떠안게 된다. 앞서에서 잠간 말하여 두었거니와 그럴 경우에 작가는 과학적/학문적/문학적 ! 방법론을 필수적으로 익혀야 한다.
과학적 방법의 요체는 분석과 설명에 있다. 분석과 설명이 합리적/논리적/체계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러한 방법에 의거하지 않고는 또 다른 사실을 다른 이들이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렇지 않고는 주관적 사실은 객관적 사실로 거듭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과학적 분석과 설명을 이미지를 통하여 이루어낸다. 이 점에서 창작인은 개념을 길잡이로 특정한 사실을 분석하고 설명하는 문학인과는 다르다. 이렇게 해서 창작인은 또 다른 사실의 객관화에 나아가는 것이다. 이런 작업이 쉬울 수가 없다. 그러나 또 다른 사실의 객관화보다 더 어려운 것이 또 다른 사실 그 자체의 창조이다. 이러한 창조야말로 허구짓기의 핵심이다. 말이 쉽지 창조가 누구네 집 아이 이름인가. 이보다 더 어려운 일이 과연 또 있을까 싶다.?!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믿고 있는 사실을 무슨 수로 뒤집을 수가 있나. 수만 년 거기에 머물러 있는 산을 무슨 수로 거기에서 산이 사라지고 없다고 말할 수가 있나. 심장이 멎으면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진리인데 무슨 수로 심장이 멎어도 사람은 죽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가 있나. 사랑에 빠지면 이 삼년만에 시들해지고 마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인데, 최근에는 의학자들까지도 나서서 그런 사실에 못질을 하고 있는데, 무슨 수로 사랑은 영원하다고 우길 수가 있나. 물론 우기면 될지도 모른다. 요즘의 세태에서처럼 말이다. 그럴듯한 문자를 동원하여서 (또 그럴듯한 완장까지 구해서 팔뚝에 찰 수 있다면 더욱 효과가 있으리라) 핏대를 한껏 돋우어 바득 바득 우겨 보면 효험을 보게 될런지도 혹 모른다. (사실 이름있는 시인들의 시를 보면 말만 번지르할 뿐! 이와 조금도 다르지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미안한 말이지만 그런 경우는 우매한 백성에게나 통할 따름이다.
작가가 혹세무민을 일삼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있는 산을 없다고 하거나 죽은 사람을 살아있다고 하거나 사랑은 영원하다고 하는 것은 작가가 창조해 내기에 좋은 또 다른 사실의 예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작가의 자유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듣는 이가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어주는가 하는 점은 문제로 남는다. 확실한 증거가 첨부되지 않는 주장은? 황당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오래도록 누구나 그렇다고 믿어온 어떤 사실을 부정하려면 그에 앞서 그 사실의 속성을 샅샅이 알아야 하는 것은 상식이다. 부정이건 긍정이건 주장하는 이가 확실한 논거를 갖추어서 합리적으로 선후관계를 따져가며 말해 주어야 듣는 이가 말하는 이의 말뜻을 알아차린다. 그런 연후에야 비로소 듣는 이는 가타부타 그이 입장을 밝히게 된다. 이렇?! ? 보면 창작인은 먼저 과학인에 버금가는 과학적인 사고와 방법에 능통해지는 것이 순서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또 처음에 제기한 문학과 창작의 차이라는 것이 한계가 있는 말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도 된다.
(4) 창작과 창작인
1) 문학적 기제
문학의 언어에서 기본이 되는 것은 비유법이다. 어떤 사물을 어디에 빗대어서 말하는 것이 비유의 어법이다. 작가는 어떤 사물을 직접 대면하지 않는다. 그는 그 사물을 대신하는 다른 사물을 내세운다. 여기서 어떤 사물을 대신하는 또 다른 사물은 비유적 상징이 된다. 이렇게 상징을 골라서 비유하는 방식에 여럿이 있다. 직유/은유/환유/제유/풍유 등이 그러한 예이다. 이 가운데서도 가장 보편적인 비유법은 직유와 은유이다. 강철 같은 심장이라고 하면 심장이 강철에 비유되는 경우이다. 이런 비유가 직유이다. 인생이 흐르는 물에 비유되는 경우는 흔하다. 이런 비유는 은유이다.?
작가가 건네는 말도 의미가 명료한 단어를 통하여 하지 않는다. 그는 의미가 명료하지 않은 이미지를 통하여 말을 한다. 그 여인이 한 남자를 유혹한다고 하자. 여기서 키 워드는 셋이다. 여자/남자/유혹이 그것이다. 이 셋이 중심인 이 문장은 주어/완전타동사/목적어로 구성된 문장 제 3 형식에 해당이 된다. 여기서 단어의 의미나 문장의 구성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시인은 위와 같은 명확한 말을 버리고 아래서와 같이 표현한다. 꽃 내음 속 벌. 여기서 단어의 의미나 문장의 구성은 위의 말과 반드시 똑 같다고 단언할 수가 없다. 그 밖에도 달리 해석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어느 쪽으로 해석되는가는 전적으로 서사의 전체적 맥락에 달려 있다.
이와 같이 이해되는 비유어법의 핵심은 상징과 이미지에 있다. 창작인이 적절한 상징의 설정과 그 상징이 가지는 이미지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이다. 창작인이 비유법으로 말한다는 원칙은 사물/사실에 대한 분석과 설명에 있어서도 두루 적용된다. 그렇다고 이것이 창작인의 그러한 분석과 설명이 비유법으로 충분하다는 뜻은 아니다. 여기에는 그 밖에도 여러 가지 literary devices/문학적 장치/기제/기법이 필요하다. 완곡하게 말하기라든가 수사적인 표현이라든가 소리의 라임이나 의미의 리듬을 맞추는 일이라든가 생략이라든가 하는 것도 그러한 예이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 보다 습득이 어려운 것이 기법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일련의 문학적 배려이다. 새로운 사실의 창조를 강조하는 경우에는 이 기법이 보다 중요성을 띄게 된다.
앞서 거론한 삐딱한 말/oblique orations이 대체로 문학적 기법에 해당이 된다. 삐딱한 말을 만드는 방식이 문학적 기법이라고 보아 두면 무방할 것이다. 삐딱하게 말한다는 것은 사물/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고 비틀거나 깍아내리거나 부풀리거나 또는 아예 반대로 말하거나 한다는 듯이다. 삐딱한 말 또는 문학적 기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들 사이에는 서로 사이에 성격과 정도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사실을 부정하는 말이라는 점에서는 모두가 같다. 본래의 사실/사물에 대한 부정을 전제로 한 말이 삐딱한 말 또는 기법이다. 창작에서 기법의 쓰임은 아주 중요하다. 그에 대한 이해가 긴요한 까닭이다. 대표적 기법에 대하여는 간단하게라도 설명을 하여둘 필요가 있다.?
기법에는 널리 쓰이는 wit/humor가 있다. 둘의 의미는 서로 비슷하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휴머는 부풀려서 말함으로서 자기의 아량으로 상대방의 약점을 덮어준다. 위트는 반대로 자기의 강점/지혜로 상대방의 약점을 은근히 드러낸다. 둘은 이처럼 차이가 있지만 사물의 있는 그대로를 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본질이 다르지 않다. 다만 이 둘의 경우 사물/사실 부정의 정도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미미할 따름이다. 사실 부정의 입장이 명료하게 드러나는 기법이 cynicism/냉소이다. 그러나 냉소에서의 사실 부정은 지극히 소극적이다. 사실 부정을 위한 이렇다할 언행이 따르지 않는다. 단지 입가에 쓴 웃음을 흘림으로서 그런 사실 부정의 입장만을 분명하게 드러낼 따름이다.
사실 부정을 적극적인 행동으로 옮기는 첨단병기는 따로 있다. 행동이 적극적인 만큼? 현재의 사실을 부정하는데 있어서 뿐만 아니라 새로운 또 다른 사실을 창조하여 내는 작업에 있어서도 그것들의 역할은 남다르다.? satire/sarcasm/irony/paradox가 그러한 예이다. 역할이 큰 만큼 그것들에게는 각자가 활동하는 그 나름의 전문영역이 있다. 관련 사실의 성격에 따라서 우선 satire/sarcasm이 하나로 묶인다. 그리고 irony/paradox가 다른 하나로 묶인다. 부정하고 새로 만들어내는 사실이 도덕적인 가치에 해당이 되는 것을 가지고 활동하는 것이 전자이다. 그러한 사실이 사실적 가치에 해당이 되면 후자가 나서서 활동을 하게 된다. 도덕적 가치는 선인가 악인가 하는 기준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인간적 가치를 이름이다. 사실적 가치는 진실?! 寬? 허위인가 하는 기준을 가지고 논할 수 있는 인간적 가치를 말한다.
satire와 sarcasm은 우리가 흔히 해학과 풍자라고 말할 때 풍자에 해당하는 기법이다. 둘? 사이에 본질적 차이가 있지는 않다. 둘 다 선과 악으로 인간의 가치를 나누어 선에 호의적이고 악에는 적대적이다. 우리가 흔히 둘을 하나로 아우러서 풍자라고 부르는 것은 그래서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둘이 반드시 꼭 같은 것은 아니다. sarire와 sarcasm 사이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 satire는 악에 대한 그의 적대적 행동이 보다 소극적이다. 따라서 satire가 악의 가치에 상처를 주지는 않는다. sarcasm은 반대로 악에 대한 그의 적대적 행동이 보다 적극적이다. 그것은 그래서 끝내 악의 가치에 상처를 남긴다.
irony와 paradox는 우리가 흔히 반어와 역설로 번역하여 말하곤 한다. 이 둘 사이에도 본질적인 차이가 있지는 않다. 인간의 가치를 진실과 허위 둘로 나누어 본다는 점에서 둘은 같다. 반어나 역설은 어떤 사실을 정면에서 반대한다. 가령 목욕탕의 뜨거운 물 속으로 들어가면서 우리는 때로 “아이 시원해”라고 한다. 지나가는 예쁜 여인을 보면서 남정네들은 간혹 “죽여 주네”라고 한다. 맑은 가을 하늘을 쳐다보면서 느닷없이 “날씨 한번 더럽게 좋네”라고 한 마디 던지는 이도 있다. 이런 말들이 반어이다. 어떤 사물/사실을 반대로 말함으로서 그 사물/사실을 더욱 강조하게 되는 어법이 반어이다.
역설도 과거 이래의 어떤 사실에 반대한다. 그러나 이 경우 사실의 반대는 시간이 변화한 뒤에야 분명하여진 것이라는 특징이 있다. 역동적 변화에 힘입어서 어떤 사실의 반대가 명확하여진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다 그렇게 알고 있었지만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여기서 그들이 비로소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을 우리는 역설이라고 부를 수 있다.
2) 창작인의 긍지
위에서 여러 기법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새로운 사실을 창조하는 작업에 있어서 모두가 도움을 줄 것이다. 기법은 다 저 나름의 구실이 따로 있어서 그 사이에 우열이란 있을 수가 없다. 다만 기법의 활동이 적극적인가 소극적인가의 차이에는 일정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에 따라서 기법이 각기 이루어내는 기여에 대소의 구별이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적극적인 활동을 하는 기법에는 두 개의 계열이 있다. 하나는 도덕적 가치를 다루는 기법이다. satire/sarcasm이 그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실적 가치를 다루는 기법이다. irony/paradox가 그것이다. 세상만사에는 둘의 가치가 뒤범벅이 되어 있게 마련이다. 어느 것의 가치를 중시하는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작가의 자유로운 선택에 달려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작가의 도덕적 가치관이나 사실적 가치관이 개입하는 것은 최대한 억제되어야 하리라는 생각이다. 물론 그런다고 그런 가치관이 작품에 묻어나지 않을 리는 없다. 인간이 가치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인간이 가치분별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은 동물이나 기계와 구별되는 것이다. 가치관의 유무가 인간을 동물이나 기계와 구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는 뜻이다. 가치관은 인간조건의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도덕적 가치관이나 사실적 가치관을 마구 개입하여 창작을 하여도 좋은가. 그렇게 되면 작품은 정치인의 선전물이나 목사의 설교집이나 교수의 강의록이나 검사의 수사기록과 별반 차이가 나지 않게 된다. 창작인이 마치 자기가 학자나 신부나 형사라도 되기나 하는! 것처럼 선이다 악이다 또는 진실이다 거짓이다 목청을 돋우는 일은 무어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일이다.
로맨스인가 불륜인가를 따지는 일은 목사님에게 맡길 일이다. 살인인가 아닌가는 형사에게 맡길 일이다. 대통령 탄핵을 하던지 말던지는 정치인에게 맡겨서 처리하게 하면 된다. 창작인이 할 일은 따로 있다. 창작인이 무슨 권리로 무슨 여력으로 남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목소리를 높이는가. 제 할 일이나 열심히 할 일이다. 불륜이건 말건 살인이건 말건 탄핵이건 말건 창작인은 거기에 미학의 세례를 주기만 하면 된다. 세상의 오만가지를 아름다운가 추한가의 기준으로 관찰하는 것은 창작인이 피해갈 수 없는 그의 의무이다.?
인간에게 기본이 되는 가치가 진위/선악/미추의 세 가치이다. 이 셋 가운데서도 인간 하나 하나를 동등하게 다루기에 가장 적합한 가치가 바로 미추의 가치이댜. 이 가치로 세상을 내려다 보는 예술인이 휴먼니즘에 가장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 패를 지어 다투는 것의 대부분은 선악이나 진위를 내세우는 데서 발생하는 것이 현실이다. 거기에 세속적인 욕망들이 만나서 서로 충돌/투쟁을 일으킬 소지가 가장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곳에서는 패지어 일어나는 싸움이 끊이질 않는다. 패거리 싸움이 끊임이 없는 곳에서 휴먼니즘은 결코 꽃피울 수가 없다. 이 점에서는 미추의 가치를 유독 예술인에게 허가해준 것이 그에게는 더함 없는 특권이고 긍지이며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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