藝堂의 산문

문학기행(운주사편)

예당 조선윤 2007. 7. 16. 18:54

천불천탑 - 전남 화순 운주사

                                                                              편집/예당/조선윤

 

기다리던 서울역 연세빌딩 앞에서 집결하여 떠나가는 맥심 문학기행이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떠나는 문학기행이라서 설레임으로 가득하다

아침일찍 준비하여 서둘러 떠났더니 아무도 보이지않고 선두로 왔나보다 하며 기다리니

한분 두분 반가운 미소로 반긴다. 장마철이라 떠나는 아침에도 비를 뿌리니

일정이 즐겁지 않을까 내심 걱정이었는데 날씨 조차 좋아서 기분을 한층 업 시킨다

 

일행을 실은 관광 버스는 신나게 달려 운주사에 도착하였다

천불산 운주사는 천불천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 불교의 깊은 혼이 서린 운주사는

우리나라의 여느 사찰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불사를 한 불가사의한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불상들은 일주문을 들어서면서 부터 천불산 주변에 바위틈에, 야산에, 들에

정말 여러기가 배치되어 있다. 불상의 머리가 훼손되어 뒹구는것부터 가족 불상, 아기불상등

크기도 모습도 표정도 다른 불상들을 볼 수 있다.

천불사의 탑들은 정말 각가지의 모양으로 개성을 나타내고 있다.


                         운주사 구층석탑

 

구층석탑은 한반도의 지형을 배로 파악한 도선선사가 호남이 영남보다 산이 적어

배가 기울 것을 염려하고 이곳에 1,000개의 불상과 불탑을 하룻밤 사이에 조성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요헨 힐트만 (<미륵 : 운주사 천불천탑의 용화세계>- 학고재)교수가 반한 운주사는 말없이

지금도 그대로 그 땅에서 묵묵히 서 있다.

 

                                            운주사 구층석탑

 

운주사 남쪽 입구에 있는 고려시대 9층석탑은 운주사 석탑 가운데 크기가 가장 크고 높은 것으로

큰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커다란 바위 위에 3, 4단의 각형(角形) 받침을 조각하고 그 위에 바로

탑신이 놓여 있는 형식으로 지대석과 기단부가 생략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상륜부에는 원주형의 석재와 보륜(寶輪) 등이 놓여 있다. 이 석탑은 전체적으로 불안정한

비례감을 보여주며 탑신부의 기하학적인 문양이나 옥개석의 끝부분이 약간 반전된

모습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운주사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불상군으로 편의상 가불상군이라함

 

운주사 천불 천탑과 와불의 이야기는 미륵 신앙과 결부시킴으로써 일약 운주사를

유명하게 만든것은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이다

민간에서는 할아버지부처, 할머니부처, 남편부처, 아내부처, 아들부처, 딸부처,
아기부처라고 불러오기도 했는데, 마치 우리 이웃들의 얼굴을 표현한 듯 소박하고 친근하다.
이러한 불상배치와 불상제작 기법은 다른 곳에서는 그 유형을 찾아볼수 없는
운주사 불상만이 갖는 특별한 가치로 평가받는다. 
 

신라 말에 도선국사가 산이 많은 영남에 비해 호남에는 산이 적어 한 쪽으로 기울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하룻밤 사이에 도력으로서 천불과 천탑을 조성했다고 한다. 
이곳의 석불상들은 10m의 거구에서부터 수십cm의 소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양을 하고 있다.

 

뒤로 보이는 운주사는 대웅전과 요사채등이 자리잡고 그앞으로도 말없이 불탑과 불상들이 서 있다.

이렇게 못난 불상들은 무엇 하나 내세울 것 없이 비슷비슷한 모습이지만 오히려
잘 생긴 불상에 비해 더욱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 온다. 무표정으로 골짜기
마다 서 있지만 그들은 찾는 이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며 어마어마한 웅얼거림으로
운주사를 감싸고 있는 것은 아닐 런지...

 

우리나라에서 운주사처럼 신비스럽고 많은 궁금증을 자아내는 절이 또 있을까?
수많은 불상과 탑이 왜 이곳에 세워졌는지 어떠한 문헌도 찾아 낼 수 없어

애간장을 태우는 곳이기도 하다. 널브러진 돌 조각을 보면서 수수께끼를 풀고

상상력만으로 이 절의 내력을 추측할 수밖에 없다.
하긴 운주사에 와서 무엇인가 알려고 하지 마라.
그런 생각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저 한적하게 거닐고 나름대로 감동 받으면 그만인 것을….

                                                    운주사 석조불감

 

 

운주사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조불감. 보물 제797호. 높이 석조불감 507cm,

남쪽 석불좌상 245cm, 북쪽 석불좌상 264cm. 지대석 위에 5매의 판석을 세워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1매의 넓은 갑석을 얹은 다음 석조불감이 놓여 있다.

 

감실(龕室)은 장방형으로 좌우벽면은 판석으로 막았으나 앞뒷면에는 출입구를 내어

불상이 밖에서 보이도록 했다. 지붕은 팔작형태로 정상에는 용마루가 수평으로 표현되었고

그 양쪽으로 치미( 尾)를 장식했다.

 

감실 안에는 2구의 석불이 가운데 세워진 1매의 판석을 사이에 두고 서로 등을 맞대고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0에 보이는 "雲住寺在千佛山……

又有石室二石佛相背而坐"라는 내용과 일치한다. 남쪽을 향하고 있는 불상은 머리 윗부분이

파손된 상태인데 넓고 편평한 얼굴에는 눈썹과 콧등의 일부가 시멘트로 보수되어 있다.

 

짧고 굵은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지만 목과 어깨부분이 붙어 있어 둔중한 느낌을 준다.

밋밋한 몸체 위로는 통견(通肩)의 법의를 걸쳤으며 옷주름 표현은 선각으로 형식화되었다.

오른손은 배에 대고 있는 반면 왼손은 어깨에서 일직선으로 내려와 무릎 위에 얹고 있으나

제대로 연결되지 않아 어색하다. 광배는 불신(佛身)과 약간 떨어진 뒤쪽의 판석에 두광과 신광의

구분없이 구불구불한 선으로 표현했는데, 불꽃무늬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북향한 불상도 같은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나 두 손은 옷 속에 감싸여 있어

정확한 수인(手印)을 알 수 없다. 특히 옷주름이 어깨 위에서 내려오면서 가슴 앞의 손 부근에

집중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매우 도식적이다.

 

이 불상들은 넓적하고 평면적인 얼굴표현이나 밋밋한 체구, 도식화된 옷주름 및 치졸한

조각수법 등에서 고려시대의 지방화된 양식을 잘 보여준다.

석조불감 역시 각부의 세부표현이나 결구방식이 세련되지 못한 점 등에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석재로 만든 거대한 크기의 불감이라는 점이나 감실 안에

2구의 석불좌상이 안치되어 있는 보기 드문 예라는 점 등에서 고려시대 불교미술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운주사 원다층 석탑

 

운주사의 석조불감 바로 뒤편에 있는 고려시대의 다층석탑. 보물 제798호. 높이 571cm.

2단의 지대석 위에 단층의 기단이 놓여진 석탑으로 지대석·기단부·탑신부가 모두 원형으로 되어 있다.

현재 탑신부가 6층까지 남아 있으나 전체적인 형태로 보아 그 위에 몇 층이 더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기단은 높은 편으로 5매의 돌로 구성되었는데 각 면을 10각으로 깎아 원형에 가까운 형태이다.

기단갑석은 윗면이 편평하고 측면이 둥글게 처리되었으며 그 표면에는 16엽의 앙련(仰蓮)이

조각되어 있다. 탑신부는 옥개와 옥신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1·2·3층의 옥신석에는

중앙에 2줄의 음각선이 돌려져 있고 4·5·6층에는 1줄만 있다.

 

옥개석은 기단갑석과 반대로 아랫면이 편평하고 측면이 호형(弧形)으로 되어 있다.

1층 옥개 아랫면에는 2줄의 음각선이 얕게 새겨져 있으나 2층 이상에는 1줄뿐이다.

각 층의 원형 옥개석은 위로 올라갈수록 옥신석과 함께 완만하게 줄어들면서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이 석탑은 원형으로 된 형태와 구성 등이 모두 일반적인 석탑형식에서 벗어나고 있어,

고려시대에 유행한 이형석탑(異形石塔)의 한 예로 볼 수 있다.


                                  절벽에 마애여래좌상이 암각화되어있다   

 

 마애여래좌상 바위에 새겨진 부처님 모습은 언뜻 지나치면 아무것도 안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봐야 부처님 형상이 보인다 여름철이라 나무가지에 가려 지나치기 쉽상이다
5분정도만 오르면 공사바위가 나타난다  
 

                   마치 인생의 무개를 머리로 바치고 있는 듯한 큰바위 밑으로 보이는 불상들.

 

운주사 대웅전 왼편 산 쪽으로 계속하여 올라서면 계곡마다 등성이마다 석탑과 석불이 보인다.

이렇게 못난 불상들은 무엇 하나 내세울 것 없이 비슷비슷한 모습이지만 오히려
잘 생긴 불상에 비해 더욱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온다. 무표정으로 골짜기
마다 서 있지만 그들은 찾는 이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며 어마어마한 웅얼거림으로
운주사를 감싸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운주사 하면 생각나는 와불(누워있는 불상).

 

와불이 실제로 와불이 아니라 미처 일으켜 세우지 못한 부처라면 와불과 함께 계곡과
골짜기에 세워 놓은 서로 다른 모양의 탑과 불상 그리고 칠성바위를 만든 이들은 누구이며

무슨 목적으로 언제 만들었는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 와불을 보기위해 운주사에 온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 위에 누워 있는 와불.

운주사의 모든 전설은 이곳에서 부터 시작된다.

운주사 와불은 도선국사가 하루낮 하루밤 사이에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며 천불 천탑을 조성하던 중

마지막  때에 이르러 닭울음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날이 샌줄 알고 천상의 석공들이

모두 하늘로 가버려 와불만 누운 상태로 남아 있다는 전설이 전해져온다.

 

 와불이 일어나는날 민초들이 꿈꾸는 새로운 용화의 세계가 열린다고 한다.

 미륵이 도래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평화와 평등,자유,풍요로운 이상향이 펼쳐진다고 한다.

 언젠가 고창 선운사의 미륵불 배꼽에 비기가 전해져 오는데 그 비기를 꺼내면 미륵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전설을 들은적 있다. 그와 같은 염원을 민초들은 얼마나 원했을까!

 그들의 기원이 이 와불에도 담겨 있다고 생각하니 요즘 처럼 어려운 시기에 나 역시

 이 와불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그러나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즐겁게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다. 와불이 누워 있는 것도 가르침이기때문에...

 

 이 와불이 일어서는 날 천불천탑의 꿈은 이루워질련가.

                        북두칠성 별자리 모양 그대로 자리하고 있다고 하는 칠성바위.

 

이 절의 창건연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신라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풍수지리에

근거해 비보사찰(裨補寺刹)로 세웠다는 설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즉 우리나라의 지형을 배 모양에 비유, 배를 진압할 물(物)이 없으면 침몰하기 쉽기 때문에

그 중심부분에 해당하는 운주곡에 천불천탑(千佛千塔)을 하룻밤 사이에 세워 내실(內實)을

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운주사와 도선과의 연관은 어떤 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므로

조선 후기에 유행한 비보사상을 바탕으로 후에 첨가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동국여지지 東國輿地志〉에 고려승 혜명(惠明)이 무리 1,000여 명과 함께

천불천탑을 조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혜명을 970년(광종 21)에 관촉사 대불을

조성한 혜명(慧明)과 동일한 인물로 본다면 운주사는 고려초에 건립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 절의 연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는 절로서 천불천탑과 석불 2구가

서로 등을 맞대고 앉아 있는 석조감실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1984년 제1차 발굴조사 때 '홍치 8년'(弘治八年)이라고 새겨진 기와편이 발견되어

1495년(연산군 1)에 4번째 중수가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으므로 조선 초기까지는

존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뒤 정유재란으로 폐사된 것을 1800년경에 설담자우(雪潭自優)가

땅에 묻힌 불상과 무너진 불탑을 세우고 약사전 등을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84~89년 4차례에 걸친 전남대학교 박물관의 발굴조사 과정에서 금동불입상을 비롯하여

순청자, 상감청자, 분청사기의 파편, 기와편 등이 출토되었다.

그결과 운주사는 늦어도 11세기초에는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는 비구니가 수도하는 절로 요사채·종각, 그리고 새로 신축된 대웅전·지장전·승방 등이 있으며,

주변에 91구의 석불(완형 50구)과 21기의 석탑 등이 흩어져 있다.

이 가운데 석조불감(보물 제797호)·9층석탑(보물 제796호)·원형다층석탑(보물 제798호)·

와불(臥佛) 등이 대표적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와불상 앞에서 정답게 한컷

 

구름이 지나가다 깜짝놀라 모른 척하며 자락을 편다.
꽃다이 사랑하라. 꽃다이 사랑하라.
아직 천년이 모자라거들랑 잠자리 날개로 이불이나 삼으시라.

 

수많은 석탑과 돌부처가 흩어져 있는 운주사 계곡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에 있는 절 언저리의 천불산 골짜기에 줄지어 서있는
용화세계를 꿈꾸는 민초들의 바람이 깃들어 있다

 

산사, 그 곳에서의 삶은 표정이 다르다

고요하면서도 너그럽고 서로를 위해 서로의 일부가 되는 평화가 있고

천길 벼랑 같은 외로움이 있는가 하면 섬광처럼 번쩍이는 치열한 삶의 경계가 있다.

 

와불 옆 그늘에 앉아 쉬면서 소원을 빌었다.

와불상은 내 마음을 알고 소원을 들어줄 것만 같았다

지금도 운주사의 풍경소리가 들리는듯 하다.

 

수고해주신 임원진님들 수고와 봉사 덕분에 화려한 외출이 되어

정다운님들과 반가움의 해후를 나누며 한마음으로 동행하며 행복했다.
 
이자리를 빌어 후원을 아끼지 않는 동서측과 사랑의 떡을 전달해주신
문우님과 사랑의 눈길을 보내주신 님들과 사진을 찍어주시느라 수고해주신
문우님들께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글을 보시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다.
 
2007.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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